무슨 나무였는지 모르겠다. 바람이 몹시 불었다. 바람에 나뭇잎들이 차륵차륵 부딛쳤다. 소나기가 내리는 것만 같은 시원한 소리였다. 나무가 아니라 숲이었고 여름밤이었다. 군대였다.
난 병장이었다. 시간은 0시쯤이었나? 독서실이었다. 책을 읽었다. 소설, 시, 자기계발. 영어 단어와 한자를 외우기도 했다. 공부는 해 본적 없었다. 고졸에 피시방과 알바를 전전하다 입대했고 곧 제대였다. 그래서 군대에서 책을 읽었다.
노크도 없이 몇 평 되지 않는 독서실의 문이 열리고 영화가 고갤 들이밀었다.
”역시, 너 있을 줄 알았다.“
난 ‘웬 일이야?’라고 말했던 것 같다. 영화는 내 동기고 친했던 적은 없었다. 내 동기들은 모두 친하지 않았다. 희생이란 말은 천국처럼 멀고 서로 의지한 기억도 없이 병장이 되기까지 비겁하고 비열한 모습만 봤다.
”무슨 책 보냐?“
‘그냥 뭐 소설.’이라 말했을 것이다. 영화는 뭔가 용무나 부탁이 있을 것이다. 내가 무슨 책을 보는 지는 이 년이 거의 다 된 지금까지 한 번도 궁금한 적이 없었을 것이다. 앞으로도.
영화는 책상 옆 칸에 앉았다. 편지에 관심도 없는 날씨 이야길 쓰듯 멀리 돌고 도는 이야기로 내 독서를 방해했다.
‘야, 할 말이 뭔데.‘ 아마 이런 말을 했던 것 같다. 너무 차갑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바로 뒤에 ’담배 피러 갈래?‘라고도 말했던 것 같다.
“너 기억 나냐? 내 여자친구가 나보고 제대 전에 운동 좀 하라고 했던 거. 갑자기 웬 운동이냐니까, 피시방에 갔는데 알바하는 애 팔이 멋지다면서.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고.”
기억난다. 근무 나간 인원을 제외한 모든 인원이 모여있던 휴게실에서 어줍잖은 기강을 잡고 있을 때였나. 아무도 듣고 있지 않았는데, ‘피시방 알바한테 관심 있는 걸까? 잘생겼을까? 동생이라던데 군대도 안 간 새끼가. 아냐, 그냥 말 그대로 내가 몸 좀 만들었으면 하는 거였겠지. 여자들이 나중엔 얼굴보다 몸을 본다든데 여자친구도 이제 바뀌는 건가?’했던 거.
“어, 기억 나. “ 알 것 같았다. 영화 여자친구와 피시방 알바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긴 거라는 걸.
영화는 탈영 의지를 드러내는 것을 시작으로 여자친구에게 처음 반한 일과 설레던 데이트와 여행, 첫 싸움 등 몇 가지 일화를 들려주었다. 영화의 여자친구가 얼마나 예뻤는지 얼마나 서로 좋아했고 특별했는지 내게 또는 자신에게 증명하려는 것 같았다.
한 시간이 조금 더 지났을 때쯤 영화는 더 말이 없었다. 카세트 테잎처럼 잠시 덜컥이며 새로운 일화들을 꺼냈지만 이제 음악이 끝난 것 같았다. 불침번 근무자가 휴게실에 들어 와 우리 신원을 확인하고 복도로 나갔다. 열 개피 가량의 담배가 재떨이에 쌓였다. 몽당한 꽁초들이 찌그러지고 허리가 굽거나 부러진 채 아무렇게나 누웠다. 마지막에 끈 담배에서 리본 같은 연기가 천장을 향해 풀어졌다. 불을 꺼 휴게실은 어두웠지만 커다란 세 개의 창에서 빛이 들어왔다. 처음 휴게실에 앉았을 땐 창가만 보인다고 느꼈는데 어둠에 적응하자 빛이 당구대 안에 정리하지 않은 당구공에까지 어렴풋이 닿는 게 보였다. 뚜국 뚜국, 가끔 복도를 걷는 불침번 근무자의 군화 소리가 들렸다. 내내 소나기 같은 나뭇잎 소리가 들렸다.
“야, 등목할래? 내가 시원하게 물 뿌려 줄게.” 영화가 말했다.
“지금...? 그래.” 두 시가 조금 안 된 시간이었다. 무슨 등목이냐 가서 잠이나 자라고 말할 뻔 했다. 평소라면 그랬을 것이다. 영화는 잠이 오지 않을 것이고 잠들고 싶지 않을 것이다. 지금 시간을 테이프 늘어지듯 늘리고 싶을 것이고 내게 조금 고마움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.
스무 명은 한 번에 씻을 수 있는 샤워실에 영화와 나 둘 뿐이었다. 팬티바람에 서로 번갈아 엎드리며 등에 바가지로 물을 뿌려줬다. 영화와 난 크게 웃었다. 웃음소리가 샤워실 벽에 튕기며 더 커졌다.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떤 농담을 했는지 왜 몸을 흔들거리며 웃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. 엎드린 채로 차갑다고 몸서리치는 내 등에 손을 문지르고 다 됐다고 찰싹 때리는 영화의 손을 희미하게 기억한다. 그 손에 영화의 다양한 감정이 묻어났다.
”야, 근무 교대하나 보다. 이제 진짜 자러 가자. “
”알았어, 담배 한 대만 딱 피우고 진짜 가자.”
내무반들의 문이 열리고 군화소리가 겹치며 허겁지겁 근무 교대자들이 나왔다. 상급자는 걸어서 하급자는 뛰면서. 영화와 나만 서 있던 복도가 부산스러워졌다.
”야, 비나 왔으면 좋겠다. 진짜 시원하게.“
”그러게. “
복도에 모인 근무 교대자들은 인솔자와 인원을 파악하고 모두 1층으로 내려갔다. 멀어지는 무거운 군화소리들과 함께 복도와 계단이 경미한 지진처럼 흔들렸다. 불침번 근무자가 군모를 벗고 머리를 긁으며 우리에게 걸어왔다.
”두 분 아직도 안 들어가셨습니까? 그리고 무슨 말씀이십니까, 지금 밖에 비 엄청 옵니다.“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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